하늘 somebody

준석이가 담아두었던, 좋아했었던 하늘들. 권가가 올려두었길래 가져왔다. 이제 2년... 그립다. 내년에는 보러 갈 수 있겠지.


incendies something

며칠 전에 [incendies]를 보고 나서 한동안 소스라쳐했다. 앞으로도 생각날 때마다 그러지 않을까.

쌍동이 딸과 아들은 죽은 어머니로부터 세 장의 편지 봉투를 받는다. 딸에게 전해진 편지에는 아버지를 찾으라고 씌여 있었고 아들에게 전해진 편지에는 알 지 못했던 형을 찾으라고 씌여 있었고 마지막 봉투에는 그 둘을 찾았을 때 열어보라는 편지묶음이 들어있었다. 어머니의 유언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동생을 뒤로 하고 딸은 아버지와 오빠를 찾기 위해 캐나다에서 어머니의 고향 레바논으로 간다.

어머니 나왈은 기독교계 아랍인 출신이었는데 무슬림 남자와 사랑에 빠져 아이를 가진다. 그 남자는 오빠에게 죽임을 당하고 명예 살인으로 나왈도 죽을 위기에 처하지만 할머니의 도움으로 아들을 낳고 홀로 떠나 대학생이 된다. 할머니는 아이의 발뒤꿈치에 세 개의 점을 새기고 나왈은 꼭 돌아와 아들을 찾겠다고 다짐한다. 몇 년 후 나왈은 아들을 돌보던 고아원이 기독교계와 이슬람계 사이의 갈등 가운데서 파괴되었고 아들은 이슬람계 무장세력에 의해 납치되었음을 알게 된다. 기독교도였지만 기독교계의 일방적인 이슬람계 학살에 등을 돌리게 된 나왈은 이슬람계 반군세력의 일원이 되어 기독교계 무장세력 지도자를 저격하고 감옥에 갇히게 된다. 십수 년 동안 혹독한 고문을 견디던 그녀는 아부 타렉이라는 고문 기술자에 의해 강간을 당하고 쌍동이를 낳게 된다. 출옥하게 된 후 나왈은 감옥에 드나들던 간호사에 의해 길러진 두 아이들을 데리고 캐나다로 이주하게 된다.

자신의 아버지가 사실은 자기 어머니를 강간했던 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딸은 내내 못마땅해 했던 쌍동이 동생을 레바논으로 불러들인다. 아버지의 존재는 알았지만 현재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형 역시 지금의 생사는 알 수 없지만, 아들은 자신의 형을 찾아나선다. 수소문 끝에 형이 있던 고아원을 파괴했던 이슬람계 무장세력의 수장을 만나게 된다. 그는 나왈을 캐나다로 보내주었던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고 형을 이슬람계 무장대원으로 키웠던 사람도 자신이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형은 기독교계 무장세력과의 싸움 중에 포로로 붙잡히게 되었고 다른 이슬람계 포로를 고문해서 정보를 캐내는 고문기술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1+1=1. 나왈의 딸과 아들에게 아버지와 오빠(형)는 같은 사람이었다. 나왈이 죽기 직전 그녀는 딸과 수영장에 갔다가 발 뒤꿈치에 세 개의 점이 새겨진 사람을 보게 된다. 그의 얼굴은 아부 타렉의 그것이었다. 그 역시 캐나다로 왔던 것이었다. 아들과 딸은 어머니가 남긴 두 통의 편지를 그에게 전해준다. 하나의 수신인은 자신의 고문 기술자, 다른 하나의 수신인은 자신의 아들. 세상의 모든 달콤함을 넘어서 너를 사랑한다고 써있었다.

그냥 out of nowhere

이번 학기에 한 과목을 맡았는데 그것도 거의 끝나간다. 영어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었지만 지금은 조금 익숙해졌고, 많이 지루한 수업이기는 하지만 사실 나도 많이 배웠다. 한편으로는 만만히 볼 것이 아니구나 느꼈고 다른 한편으로는 스트로맨 같다고 해야하나, 말은 되는데 확 받아들이기는 조금 뭐한 그런 느낌이 들었다.

한동안 정신없이 살았다. 꼭 고3처럼 살았다. 써야할 글이 있었는데, 자료가 너무 늦게 왔고 그 자료가 올 때까지 난 완전히 착각을 하고 있어서 자료만 오면 바로 분석해서 글 쓰면 되겠지 하고 있다가 한 방 먹었다. 깨끗하게 정리된 자료를 받을 거라고 생각한 내가 바보였지. 아무튼 자료를 써먹을 수 있게 만드느라고 시간 많이 잡아먹었다. 다행히 학교가 집이랑 가까워서 밤늦게 터벅터벅 걸어다녔는데, 그래본 적 참 오랜만이구나 싶었다.

이번에 한국에 꼭 나가고 싶었는데 내년으로 미루게 되었다. 보고 싶은 사람들도 소중하지만, 무엇보다도 공간이 그립고 담겨있는 시간들을 되새겨보고 싶어서일 거다. 뭐, 그게 다 사람들이 채워놓는 것들이겠지만, 그래도 그네들이, 내가 채워놓은 것들이 전부라면 굳이 그렇게까지 그리워하지는 않을 것 같다. 물론 준석이 보러 청주에도 가야한다. 일년 더 미루어진게 미안하다.

올해 봄은 그냥 건너뛰나 보다...

시간, 경험 out of nowhere

새해구나. 내 나이 만으로 서른 여덟. 시간 참 빨리 갔다. 정말, 30대는 내가 20대에 꿈꾸던 시간이 아니었구나. 그 까닭은 모두 미숙하고 머리가 나쁘기 때문이겠지. 감정의 조류는 더우기 느려질 줄 모르고, 머리회전은 눈에 띄게 느려져간다. 무언가 새롭다는 것에 겉으로는 아, 그렇구나 하지만, 속으로는 그래서 뭐, 그런다. 왜일까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경험 부족 혹은 경험 부정 탓이 아닐까. 과거의 경험은 소중하게 느껴지지만 현재의 경험은 경험으로 느껴지지가 않는다. 다시 생각해보니, 그건 나이 먹어가면서 이리 재고 저리 재고 해서 미지의 영역을 미리 줄여버렸기 때문일 거다. 시간이 빨리 간다고 투덜대지만, 잡으려고 애썼던 적도 없다는 생각에 머쓱해진다. 새로움에 대한 열망이 있다고 믿어왔지만, 그저 부딪쳐보겠다고 마음 먹은 적 한 번 없다는 생각에 불편해진다. 올해도 그럴꺼니, 너는?

공허 out of nowhere

1. 작아진다는 건 슬프고 나쁜 건가? 그래서 무시당할까봐 두려워지는 그 무엇일까? 반면, 커진다는 건 기쁘고 좋은 건가? 그래서 두려워해야 할 그 무엇일까? 경제력 규모에 있어서 중국이 일본을 제쳤을 때, 와세다대 어떤 교수가 뉴욕 타임즈에 기고를 했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그 글에 깔려있었던 질문들이 꼭 위와 같았던 것 같다. 기실 그 사람 논조는 그렇게 되어서 정말 다행이라는 식이었다--왜 자기 자신을 외부로부터 정의해야 하는가? 내부의 공허를 감출 일 없게 되었으니 안도할 일이다, 라는 식. 마치 위 질문들에 그렇지 않아? 하는 이들에 대해서 불쌍한 녀석들, 하고 내뱉는 느낌.

2. 최근에 저 세상으로 간 토니 저트라는 역사학자의 에세이가 얼마 전에 마찬가지로 뉴욕 타임즈에 실렸다. 뉴욕에 관한 글이었는데, 가장 미국적이라고 하기도 뭐하고, 가장 글로벌하다고 하기도 뭐하고, 가장 로컬? 당연히 아니고, 그러면 무언가? 그의 대답은 뉴욕은 그 모든 범주들의 경계에 있는 도시일 거다, 라는 거였다. 미국은 쇠퇴하고 있고, 그래서 공허해지고, 그래서 다른 곳으로 가볼까 하지만, 그 정서 역시 뉴욕에 살고 있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거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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